"노예제도, 10가지의 실화"라는 제목의 아주 중요한 전시회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는 네덜란드 식민 시대의 노예제도에 관해서 처음으로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약 250년에 걸친 이 시기는 네덜란드 역사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재산으로, 물건으로 또는 장부상의 아이템으로 치부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 전시회는 어떠한 식으로든 노예제도에 연관되었던 사람들로부터 10가지의 실화를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수라파티에 관해 들려주고 싶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 있는 이 거대한 17세기의 가족 초상화에는, 어깨 위로 느슨하게 늘어뜨린 검은 곱슬머리를 한 젊은 남성이 있습니다. 그는 주름을 잡은 반바지와 얇은 셔츠, 그리고 오픈 재킷을 입고 있습니다. 오른쪽 어깨에는 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발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옆에 있는 여성처럼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시선은 그림을 보는 이를 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닙니다; 노예 하인처럼, 그는 고급스럽게 의상을 차려입은 가족의 그늘에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년은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에 대항한 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영웅 수라파티(Surapati)일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행동을 고취시켰고, 누군가에게는 공포를 채워줬습니다.
수라파티는 바타비아(Batavia) 지역의 한 네덜란드인의 시중을 드는 발리 출신 노예였고, 이후 노예신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도피하는 발리인 무리의 리더가 되었고, 처음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를 위해 싸웠지만 이후에는 반대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동 자바지역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곳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의 전투 때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야코브 코만(Jacob Coeman)은 1665년 바타비아에서 원로 상인인 피터 크놀, 그의 아내 코넬리아 반 니옌로드, 그리고 두 딸인 카타리나와 헤스터의 집단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수라파티는 그 가족이 소유한 수많은 노예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인데, 그가 가족 초상화에 등장했다는 건 그 집안에서 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게다가, 그는 크놀의 휘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일은 가장 중요한 하인이 도맡아 하는 업무였습니다. 자바인들의 글에 의하면, 수라파티는 통치자의 아들이었는데 한 네덜란드인의 수중에 잡히게 되었고, 바타비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어 그곳에서 네덜란드인 가정의 노예하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예 생활을 하던 시기는 서 자바인의 역사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이 네덜란드 상인의 딸은 수라파티와 사랑에 빠졌고, 많은 기록에 의하면 그는 그녀와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발람방간(Balambangan)의 역사소설에서는 그가 그녀의 구애를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는 바타비아를 떠났는데, 어떤 기록에 의하면 도망쳐서, 또 다른 기록은 그의 온전한 자유 의지로 떠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Rijksmuseum)의 도움으로 소개드립니다.
P.S. 지난 천년간 서양 미술계에서는 백인이 주된 주제였으며, 유색인종들은 대단히 과소평가되거나 잘못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예외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아프리카의 왕 카스파의 놀라운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