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이 조금 길어서 먼저 양해를 구해봅니다. 하지만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라 줄일 수가 없었어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Portrait of Elisabeth Lederer)>은 강렬하고 눈부신 작품인데요. 앉아 있는 여인의 차분하지만 자신감 있는 표정과 주변의 반쯤 숨겨진 상징들에서 이 그림이 교묘하지만 명백하게 20세기 초 비엔나 상류층의 권력, 우아함, 자신감 등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이 초상화는 개인 소장으로 클림트의 다른 여성 초상화(아델레 블로흐-바우어와 같은)보다 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비엔나의 문화적, 상업적 엘리트들을 기념하면서도 의도치 않게 그들의 운명에 대한 묘비명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막대한 권력의 레더러 가문은 로스차일드(Rothschilds) 가문 다음으로 비엔나에서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앉아 있는 여인의 옷을 자세히 보면 철썩이는 파도 안에 연한 푸른색의 용 두마리를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상징은 엘리자베스가 황제의 망토를 입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클림트는 작품에서 종종 동양적 모티프를 사용했지만 황실 도상이 있는 초상화는 이 작품이 유일하니 엘리자베스와 그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이 초상화의 경우, 작품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은 그림의 기본 톤과는 대조적으로 클림트와 그의 피사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생명과 빛, 낙관주의로 가득 찬 작품이 15년 만에 인생이 참혹하게 변하는 젊은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비극적이고도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버지가 1936년에 사망하고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마법 같았던 엘리자베스의 삶은 비극으로 바뀌었습니다. 1939년에 나치가 레더러의 예술 작품 컬렉션을 약탈했는데, 가족 초상화만이 ‘너무 유대인적’이라는 이유로 남겨졌습니다. 1921년 볼프강 폰 바호펜-엑트(Wolfgang von Bachofen-Echt)와 결혼한 후 개신교로 개종했던 엘리자베스는 1934년 이혼으로 다시 유대인이 되면서 완전히 홀로 비엔나에 남겨졌습니다 : 이혼을 하고, 어머니는 부다페스트로 도피한데다 유일하게 한명 있었던 자식까지 사망하게 됩니다.
나치의 박해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기에 엘리자베스는 1918년에 사망한 비유대인 화가 클림트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이 주장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무시되고 있지만, 몇 가지 측면—클림트가 바람둥이던 점,엘리자베스를 그리는 것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헌신, 조각가로서 그녀 자신의 입지 등—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셔제나(Szerena)는 딸을 구하기 위해 클림트 친자 확인 진술서에 서명하기도 했으니 이 전략은 성공했다고 봐야죠. 결국 엘리자베스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클림트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문서를 받았고, 고위 나치 관료였던 전 형부의 도움 덕분에 그녀가 사망한 1944년까지 비엔나에서 무사히 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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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2.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많은 상징적인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한 클림트도 초반에는 다소 전통적인 작품들을 그렸는데요. 클림트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든 그의 알려지지 않은 초상화들도 감상해 보시죠!